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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ㆍ돌ㆍ고무ㆍ수정ㆍ금ㆍ뿔ㆍ상아 등의 인재(印材)에 글자ㆍ무늬ㆍ기장(記章)ㆍ그림 등을 조각하여 인주 등을 발라 개인ㆍ관직ㆍ단체ㆍ장서(藏書) 등의 표지로 문서ㆍ서화에 찍어 증명으로 삼는 것.
도장 또는 인신(印信)이라고도 한다. 현대의 인장은 국새(國璽)를 비롯하여 대통령의 직인, 국무총리 및 각 부처 장관의 직인, 각 관청인(官廳印) 등의 관인(官印)ㆍ공안(公印) 이외에 각 단체ㆍ회사 등의 공인, 개인의 사인(私印) 등이 있다.
또한 사인에는 실인(實印)ㆍ인인(認印)ㆍ막도장 등이 있으며 실인은 면장ㆍ동회장 등에게 그 인감을 신고 등록하고 필요에 따라 인감증명서를 요구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법률상의 효력이 있다.
인인은 성자(姓字)만 또는 이름자만 새겨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에 쓰는 도장이며 막도장은 문자 그대로 인감도장이 필요치 않은 경우에 손쇱게 찍는 도장이다. 그러나 서명ㆍ날인이라 하여, 서명하는 일과 도장을 찍는 일은 현대사회에서 관습상 또는 법률상 중요한 행위로 간주된다.
인장은 BC 5000년대 후반 메소포타미아의 원시농경사회에서 발명된 것이 그 시초라 한다. 돌ㆍ점토ㆍ조개껍데기ㆍ뼈ㆍ금속 등을 재료로 하여 거기에 그림이나 문자 등을 새겨 천 또는 점토 등에 찍었다. 찍는 목적은 소유물을 표시하는 외에 주술적(呪術的)인 면도 있어 인장 그 자체를 호부(護符)와도 같이 생각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인장은 스탬프형 인장에서 원통형 인장으로 변하였고, 이것이 발칸으로 전해져 유럽 인장의 기초가 되었다.
선사시대 말기부터 동물의 무늬ㆍ신화(神話)ㆍ설형문자 등이 나타났고, 아카드왕조 이후에는 왕ㆍ사제(司祭)의 모습을 새긴 것도 나타났다. 이집트의 인장에는 상징적인 무늬, 상형문자, 회화 등이 새겨졌으나, 크레타섬에서는 초기에 활석을 재료로하여 원통형ㆍ피라미드형ㆍ원추형ㆍ입방형 등에 인물ㆍ동식물ㆍ줄무늬ㆍ그림 문자 등이 새겼고 중기에는 원통인장에서 발달한 프리즘형이 기본형으로 되었다.
후기에는 동물ㆍ신ㆍ제례 광경 등이 새겨졌다. 또 인더스 문명에서는 소수의 원통인장을 제외하고는 사각형의 스탬프 인장이 사용되었다.
중국 인장의 발달은 1세기경, 후한(後漢)시대에 종이가 발명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나무나 참대에 기록한 서간(書簡)을 봉하는데 진흙을 사용하여 거기에 인장을 눌러 봉하였다. 이것을 봉니(封泥)라 하며 각처에서 출토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장은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의 옥판(玉板)에 새긴 ‘은새(殷璽)’이며 다음으로는 동주(東周)말기 및 전국시대의 청동인(靑銅印)을 꼽는다.
인장제도가 정비된 것은 진(秦)ㆍ한(漢) 때부터이며 진의 시황제(始皇帝)는 소부에 부절령이라는 관작을 두어 국새를 비롯한 각종 인장을 관리시켰다. 한대의 관인은 중앙정부에서 관직에 따라 반포하고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정부에 반납하였다. 그 관인에는 수라고 하는 긴 끈이 달려 있어 그것을 허리에 감고 관인을 차고 다녔으므로 관직에 임명되는 것을 ‘인수를 띤다’ 고 하였다.
후한시대 종이가 발명되명서 그때까지 봉니로서 입체적으로 사용되던 인장은 평면적으로 사용하게
되어 인장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송대에 이르러 인장은 서화의 낙관으로도 사용하게 되어 많은 인영이 전해진다. 재료는 청동인 외에 금ㆍ은ㆍ옥ㆍ도기(陶器)ㆍ나무 등이 사용되었고, 청동인은 주로 주조인(鑄造印)이며 그 밖에는 조각하였다.
이 조각법은 전각(箋刻)기술로서 발전하여 지금도 중국이 자랑하는 국기(國技)의 하나가 되었다.
중세 초기의 인장은 문서의 변조를 막거나 내용의 비밀을 지키기 위한 봉인으로서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발신인을 표시하는 역활도 하였다. 6~7세기 무렵부터는 공문서의 증인(證印)으로 사용되어 가장 확실한 인증(認證) 수단이 되었으며, 그 압인법도 문서에 직접 찍는 것과 문서 끝에 줄을 꿰어 그 끝에 압인하는 수하식이 있었다.
인장의 문양도 문자인장(서명을 인장화한 것), 그림인장(성ㆍ성관ㆍ선박 등의 건조물), 초상인장
(군주ㆍ귀족ㆍ성직자), 문장인장(귀족의 가문) 등이 있다.그러나 유럽의 인장은 근세 이후 자서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개인의 사인(私印)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18~19세기 이후 인장 사용은 공문서에 한하게 되자 서명이 일반화되었다.
한국에서 인장을 사용하게 된 확살한 연대는 알수 없으나, 신라 때에는 국왕이 바꿜 때 국새를 손수
전한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사용된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인부랑(印符郞)이라는 벼슬이 있어 나라의 인장을 맡아보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이때는 개인들도 인장을 소지한 것으로 보이며, 그때 사용하던 청자로 만든 도제인장(陶製印章)과 청동인장 등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장제도는 더욱 정비되어 1392년(태조 1)부터 상서원(尙瑞院)을 두어 새보와 부패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단종의 인장인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지보’ 와 단종 왕비의 인장인 ‘단량제경정순왕후지보’ 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옥새가 보관되어 있으며, 한말에 사용하던 순금제 인새인 ‘제고지보’ 와 ‘대원수보’ , 은으로 만든 ‘칙명지보’ 도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관인에 대한 제도를 엄격히 하여 관직의 고하에 따라 크기가 달랐고, 또한 관원이 교대할 때에도 중앙과 지방에 따라 관인을 전달하는 방법을 달리하였다. 즉 1품관은 한 변의 길이가 약 8.8㎝(2치 9푼)의 정사각, 2품관은 약 8.5㎝, 3품관은7.6㎝, 4품관은 7㎝, 5ㆍ6품관은 6.4㎝, 7품관 이하는 5.5㎝로 규정하고 이들의 아내의 인장도 그 치수를 규정하였다. 한편 관원이 교대될때에는 관인을 반드시 손수 전달하도록 하여 당상관이 있는 관아에서는 당상관(堂上官)이 직접 교부하고, 3품 이하의 관아에서는 행수관(行首官)이 인계하였다.
지방관아에서 관찰사는 경상에서, 절도사ㆍ첨사 등은 진문에서, 수령ㆍ찰방 등은 아문(衙門)에서 손수 인장을 주고받았다. 옛날부터 이 인장의 인영을 모은 인보(印譜)가 성행하여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에 많은 인보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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